① 인트로 · 왜 이 스코어보드인가
한국의 연구개발(R&D)은 오랫동안 매출로 그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러나 기후기술의 성과를 가늠하는 기준은 매출이 아니라 온실가스 감축이다. 이 차이는 무엇을 개발하고 그 성과를 무엇으로 증명할지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다.
오늘의 한국 산업은 상당 부분 R&D에 기반해 성장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배터리, 자동차, 조선 등 후발주자로 출발해 세계 시장을 선도하게 된 분야는 모두 국가 R&D를 토대로 했다.
문제는 그 성공의 척도가 분명했던 만큼 공공 R&D의 필요성을 따로 설명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매출과 수출이 곧 R&D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기후기술은 이 전제를 다시 묻는다. 전력망을 재설계하거나 온실가스 측정 체계를 구축하는 일의 가치는 매출이나 수출액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매출로 답할 수 없는 영역에서 R&D의 가치는 다른 기준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한국 R&D의 성장기는 ‘추격’이라는 단순한 공식 위에 있었다. 앞선 나라의 기술을 목표로 설정하고, 정부가 자원을 집중하면, 연구소가 이를 빠르게 소화·개량하고, 대기업이 양산해 수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공식이 전제했던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약해지고 있다.
첫째, 따라잡을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 한국의 에너지·산업 구조와 정해진 일정에 부합하는 탄소중립 경로는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 둘째, 기술 도입 경로가 좁아졌다. 핵심기술은 동맹국 사이에서도 이전이 쉽지 않다. 셋째, 기후기술은 개별 제품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인프라를 교체하는 과제에 가깝다.
이 때문에 공공 R&D의 역할은 오히려 커진다. 따라갈 모델이 없을수록 분야 간 연계, 해외 기술의 국내 적용,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장기 위험의 분담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주체는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다. 공공 R&D의 기능은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추격자’에서 ‘통합자’로 이동하고 있다.
현행 평가 기준은 여전히 추격 시대에 맞춰져 있다. 투입 규모, 논문·특허 건수, 선진국 대비 기술 수준 등 대부분의 지표는 ‘R&D 체계가 원활히 작동하는가’를 측정한다. 투입과 산출은 평가하지만, 정작 ‘실제로 온실가스를 줄였는가’라는 성과는 어느 지표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지난 30여 년의 정책 기록을 살펴보면 동일한 진단이 20년 넘게 반복돼 왔다. 부처 간 분산, 실증 단계의 정체, 조직 간 인력 이동의 부재가 그것이다. 진단은 정교해졌으나, 이를 측정하는 기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투입과 산출은 재면서, 정작 ‘실제로 온실가스를 줄였는가’는 어느 지표에도 없다.
R&D가 정체되는 원인은 다양하다. 재원이 부족하거나, 재원이 있어도 적절히 배분되지 않거나, 방향이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장 구조적인 병목은 새로운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기존 체제의 퇴출 지연에 있다.
신기술이 계속 등장하는 동안에도 석탄발전과 탄소집약적 공정,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일자리는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전환을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만 이해하면 이 병목은 드러나지 않는다. 전환은 새 역량의 축적, 주류 기술의 교체, 기존 기술의 퇴출이 함께 진행될 때 비로소 일어난다.
정책은 보급에는 적극적이지만 퇴출에는 소극적이며, 세 단계 가운데 퇴출의 신호가 가장 약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전환을 가로막는 고착(lock-in)이다.
진짜 병목은 새것의 부족이 아니라, 옛것이 빠지지 않는 데 있다.
기후기술 혁신정책 스코어보드는 R&D에 점수를 매기는 평가표가 아니라, R&D의 가치를 새로운 기준으로 증명하기 위한 도구다. 과거 D램 시대에는 매출이 그 기준이었다. 기후기술 시대에는 기준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 매출 대신 감축, 수출 대신 전환 속도, 특허 건수 대신 실제 보급된 기술, 기술 수준의 상대 비교 대신 ‘2050 탄소중립 경로상의 위치’가 그것이다.
이에 따라 스코어보드는 어느 영역이 취약한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그래서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한다. 그 결과는 확정된 결론이 아니라 반증 가능한 가설에 가깝다. 사례와 이론으로 반박할 수 있으며, 아직 측정하지 못한 영역은 비워 둔다.
스코어보드는 지나간 성과를 정리한 평가표가 아니라, 2050년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지표에 가깝다. 이 작업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안건 1,359건(1991–2025)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했으며, 자료가 충분히 확보된 태양광과 수소 분야부터 사례를 채워 가고 있다.